원장 치료 에세이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수용과 전념치료의 입장에서 슬픔과 고통 바라보기

동물은 고통(두려움, 불안함 등)을 피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이후 잊게 된다. 
토끼는 매의 울음소리를 듣고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지만, 굴로 도망가서 숨고 안도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사람도 정말 그 고통의 상황만 피하게 되면, 벗어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고통’과 연관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고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작은 단서가 과거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현재에도 생생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잔인하게도, 연관이 없거나 즐겁거나 행복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통이 느끼기까지 하다.

가장 강렬한 슬픔 중 하나인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사별)로 예를 들어보자.
너무나 소중한 사람과 사별하였는데, 
당신은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보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우리는 생각과 기억, 말(언어)의 작은 단서나 연관성만으로도 힘든 감정과 생각이 떠오른다. 
즉, 인간은 심리적 고통이 느끼던 당시만, 상황만, 단서만 피한다고 해서
힘든 감정을 제거할 수도 없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사별한 사람과 상관없는 장소에서, 그 사람을 생각하지도 않던 날....
단순히 세상 아름다운 일몰을 봤을 뿐인데,
소중했던 그 사람이 떠오르고, 함께 나눌 수 없음에 슬픔이라는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러면 이러한 고통은 사별한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는 보편적인 고통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그냥 두드려 맞아야 하는 것일까? 
사별한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데, 난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걸까?

고통은 인간으로서 갖는 근본적인 부분임은 맞다.
오랫동안 모든 사람이 고통을 느끼며 살아왔고, 그것이 없는 이상적인 곳을 천국이라 여겼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스트레스가 없는 무균실이 아니기에,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정도와 빈도만 다를 뿐,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결국 고통은 
우리 모두가 원하지 않지만 인정해야하고, 수용해야하고, 직면하고 있는 
그래서 무겁지만 인정해야하는 도전적 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힘들어하는 고통은 고통 그 자체만이 전부인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사별의 고통과 우울만을 느끼는 것일까?
 
물론 사별 당시에는 애도의 슬픔과 상실감이 가장 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엄청난 에너지를 쓴다.
혹자는 좋다는 방법을 이것 저것 사용해 그 고통을 줄이려하고, 
혹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또 다른 이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기억,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잊으려고도 애쓴다. 
그리고...그들은 예전처럼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당면하고 괴로워한다.

이렇듯 우리는 큰 슬픔에서 ‘고통’이라는 감정에 얹어져 ‘괴로움(1)’ 을 경험한다. 
고통에 ‘괴로움’이라는 고통을 더 얹는다.
그리고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골몰하고 애쓰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문제’가 된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감정이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생각까지 더해져 더 고통스럽게 된다.
우울하지 않아야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우울하니(문제), 괴로움까지 얹어져 난 우울한 사람(비정상적)이 된다.    
결국, 사별의 슬픔과 애도에서 시작한 감정은 
다양한 괴로움이 얹어져 점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게 된다.

내용 첨부 : (1) 괴로움(suffering)의 어원을 보면, 실어나르다(bear or carry)의 ‘ferre’와, 아래서 위로 사라지는 (from blow, up away)이라는 ‘suf’, ‘sub’의 의미가 함께 있는 단어다. 즉, 괴로움이란 실어 나르는 무언가만 있다는 것과 멀리 도망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즉 괴로움이란 ‘너무 무거워서’, ‘너무 힘들고 슬퍼서’, ‘너무 부당해서’, ‘내 능력에 넘어보여서’ 등 실어 날라지는 짐들이 있고, 동시에 ‘이것을 기꺼이 짊어지고 싶지 않아 도망가고 싶어하는 마음’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당신은 사별이라는 슬픔을 겪은 후,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삶 속에서 ‘승리’할 때까지 치열하게 싸우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승리’는 아마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현재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우울이 없는 상태, 사별의 슬픔이 사라지는 것, 아픈 기억이 안 떠오르는 것,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불안하지 않는 것 들이 승리의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물어보자.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가능한가? 
사별의 슬픔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는가?
정말 아픈 기억이 안 떠올라질 수 있는가?  

우리는 승리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으로 많은 것을 한다. 
고통의 이유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 열심히 생각하고, 없애려 한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점검하고 정리하고 기록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 붇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일 없다는 듯 행동하거나 기억하지 않기 위해 이불로 덮고 모르는 척 굴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문제를 없애기 위해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식, 옳다는 방식으로 열심히 애쓰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으로 지금의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걸까? 
노력들이 당시에는 고통을 줄여주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다.
통제적 착각이다. 
때로는 실제로는 더 심한 수준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처음 의도와 다르게 고통의 시간이 더 길어지기도 한다. 
자기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원래 겪은 사별의 슬픔과 고통이라는 감정에 
괴로움과 다양한 감정(무력감, 분노, 자책감 등)들이 들러붙어 커다란 눈덩이로 변해간다. 

예로 돌아가 보자. 당신은 사별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상실감, 무력감, 분노나 죄책감 등의 힘든 감정을 없애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다.
침습적으로 드는 부정적 생각이나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다. 
어쩌면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 싸움에 굴복했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스스로를 책망하지는 않는가? 
불쑥불쑥 올라오는 충동과 감각들로 고통스럽고 슬픈 기억만으로도 내리누르는데 
죄책감이나 무력감, 분노까지 얹어져 그 무게에 눌리지는 않는가?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근본적인 고통만으로도 힘든데, 
괴로움의 무게까지 얹어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것이 맞는가?

솔직해지자! 
당신은 이미 현실에서 일어난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나와의 싸움에서 괴로움을 얹어 더 힘들게 할 필요가 없다.
그 질 수밖에 없는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괴로움의 덧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만들 필요가 없다.

우리는 무언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빠르고 민첩하고 뛰어오르거나 점프하는 방법이 맞다고 배웠다. 
그 방법이 울타리안에 갇힌 상황이라면 맞는 방법이다.
삶의 문제에서 애쓰고 방법을 찾아 강구하면 빠져나올 가능성은 높아진다. 
하지만 그곳이 모래늪이라면, 그 방법은 잘못되었다. 
한발을 들어 걸어 나오려 하면, 몸의 무게가 다른 한발에 실려 그 발은 더 빠질 것이다. 
뛰거나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즉 모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쓸수록 모래 늪에 더 깊이 빠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고통의 순간 우리는 빠져나오려 서둘러 행동하지만, 애쓸수록 모래늪에 빠져드는 반대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어쩌면 모래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보다 현명하고 안전한 행동은 
움직임을 줄이고 누운 자세로 모래에 신체 표면적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해야할 것은 
더 빠지지 않고 모래늪과 함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몸에 힘을 빼고, 모래늪에 누워 신체접촉을 최대한 유지하고 내 자신이 더 빠져들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 먼저다.
모래늪에 누워 있는 것이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모래늪과 함께 있는 방법이 먼저다. 
그러면 그 다음이 보이게 된다.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면 구조를 요청을 할 수 있다. 
손을 뻗어 닿는 사물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고통에 휩싸여 허우적거릴 때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일 수 있다. 

그럼 내가 알고 해왔던 방법이 다 틀린걸까?
그렇진 않다. 뛰어나오거나 점프하는 것은 울타리 안에서 빠져나오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모래늪이라는 상황과 장소의 맥락이 바뀌었는데, 
어쩌면 나는 과거에 성공했던 방법을 고집하여 뛰고 있어 현재는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인간의 마음은, 감정은, 생각은 현실의 문제해결방식과 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정상’ 혹은 ‘옳은 진리’이라고 생각하는 말(언어)에 갇혀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수 있다. 
당신은 목표를 설정한다(내가 원하는 것은 우울이 없는 상태/ 사별의 상처에서 회복/ 외상적인 과거 기억의 늪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오기/ 사람들과 문제없이 잘 지내기).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보면 이 말이 ‘정상’, ‘문제해결’, ‘옳은 진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체적 질병에서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없는 상태가 ’정상, 문제해결’이라고 보지만, 
심리적 상태에서 이러한 정상성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 
정말 삶에서 우울 없이 사는 사람이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의 상처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가능한가? 
사람들의 비난과 눈빛이 전혀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가정의 말에 갇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을 수 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고통 앞에서 무슨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
내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그 기간 동안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어떠한 노력과 방법으로 투쟁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만약 옳다고 생각되는,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던 것들을 했는데 
오랜 시도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없었다면, 왜 그런지 생각해봐야 한다. 
맞다고 하는 방법으로 애쓰고 노력했는데 매번 좌절하여 무기력해지지는 않았는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투쟁한 결과에도 문제가 반복된다면, 
그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최소한 그 방법은 아닌거다!
당신은 스스로가 모래 늪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다양한 해결책을 시도해왔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투쟁하고, 가라앉고, 괴로움을 겪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해왔던 방법으로는 모래늪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해결하기 위해 그리 애썼으면 됐다.
당신이 맞다고 생각했던 그 ‘옳은’ 방법을 이제 그만 내려놓자. 그 방법은 아닌거다! 
이젠 그 발버둥치며 해결하려 애쓰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껏 해본 적 없는 시도, 여행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길을 떠날 채비를 해야한다.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움을 겪어오지 않았던가?       

최소한 당신은 당신의 고통에 괴로움을 덜어내고 살 수 있다. 
당신의 과거와 더불어 살 수 있고, 당신의 기억과 함께 지낼 수 있으며, 
두려움이나 슬픔의 감정을 완전히 없앨 순 없지만 
지금의 삶을, 원하고 바래왔던 삶을 충만히 살 수 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투쟁하느라, 승리에 매달리느라, 나와의 끝없는 싸움을 하느라 
쏟았던 에너지를 거둬려야 한다. 
그리고 감정과 생각이 왔다가 지나갈 것임을 알고 기다리자.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지 마라. 
당신은 고통의 일정부분을 안고, 
스스로가 원했던,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당신의 에너지를 쓸 수 있다. 
잘못 쏟아 부었던 에너지와 노력을 
당신의 꿈과 원하는 삶, 스스로를 채우는데 쓸 수 있도록 방향을 틀어라.